daydream187 2013. 11. 30. 01:14

  OJT를 위해 임지로 떠나는 날. 전날부터 숙소를 떠나기 위해 싸 놓았던 짐들을 헤집고 어김없이 조식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현지적응훈련 기간 동안의 마지막 숙소 조식이란 생각을 하니 메뉴의 변화가 거의 없던 한 달 넘게 먹은 밥조차 특별해 보였다. 메뉴는 평소와 같았지만 먹는 느낌만은 남달랐던 조식을 마치고서 짐을 가지고 로비로 내려가 우리를 데리러 올 사람을 기다렸다. 로비에는 사무소 직원 몇 분께서 와 계셨고 동기 단원들은 많은 짐들로 인해 분주히 움직이며 혹시 빠진 것 은 없는지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이동할 준비를 하느라 마음의 준비도, 동기들과의 제대로 된 작별의 인사(비록 10일 뒤 다시 이 곳에서 만나긴 하지만)도 하지 못 하고 있던 순간에 한 현지인 부부가 자신의 임지로 파견 될 동기 단원을 데리러 숙소에 도착하였다. 짐 정리 때문에 정신이 없던 우리들은 갑작스럽게 닥친 헤어짐으로 인해 더욱 혼란스러워졌고 우리는 허둥지둥 대며 처음으로 떠나는 단원의 짐을 옮기는 것을 도와주었다. 국내교육 뿐만 아니라 현지적응 훈련동안 근 6주간 붙어서 살았던 우리였기에 몇 단원은 10일간의 헤어짐 때문인지, 혹은 자신에게도 다가올 낯섦 때문인지 떠나는 단원을 눈물로 보내기도 하였다. 그렇게 첫 단원이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기가 무섭게 다음으로 날 데려가기 위해 사람이 도착하였다. 중년의 말끔한 아저씨. 아저씨가 몰고 온 차는 비싼 일제 SUV.

  내가 일하게 될 기관은 삐라주의 문화센터(Centro Cultural Pirayuense)로 삐라주의 성당에서 기부한 땅 위에 지어진 정부에 소속된 곳이며, 집행되고 있는 예산 중 동네 유지인 기관장이 개인적으로 기부하는 금액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그런 곳이다. 이 기관에는 내가 3번째 코이카 단원으로서, 내가 파라과이에 오기 직전에 귀국한 선배 단원이 있었고 내가 OJT를 가는 이 시점에 파견된 지 약 1년 정도가 된 지휘자 선생님께서 일하고 계신 곳이기에 우리 기관에 대해 파라과이 현지 코이카 사무소는 물론이고 많은 단원들 또한 알고 있는 기관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잘 알려진 부분은 기관장인 노부부(기관장은 할머니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노부부가 함께 운영하고 있다)가 엄청난 부자라는 것.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진 않았지만 들은 바에 의하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서 제약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아무튼 부자라고 익히 들어왔었다. 그리고 10일 남짓의 OJT 기간 중엔 기관에서 잡아주는 집에서 홈스테이 형식으로 지내도록 되어 있는데 우리 동기 중 다른 모든 단원이 그렇게 기관 근처의 대부분 위생이나 편의 시설 등이 잘 갖추어져 있지 않은 허름한 현지인 집에서 머물게 된 반면 난 삐라주에 있는 기관장의 별장, 무려 작은 수영장이나 딸려있는 그런 곳에서 그 곳의 관리인 가족과 함께 살게 된 것이다. OJT를 떠나기 전 사무소에서 개별적인 상담과 함께 OJT로 가는 곳에 대해 안내를 받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 때 우리 각자가 지내게 될 집에 대해 소개 또한 받았었다. 사무소에서는 각 집의 상황을 위치, 위생상태, 안전도 이렇게 세 가지 항목으로 평가하여 종합 의견을 알려 주었는데 우리 동기 중 나만 유일하게 집의 각 평가 항목과 종합 의견이 모두 만점으로 나와 있었다.

  이러한 사전 지식을 가지고서 드디어 떠난다는 설렘과 기대감, 떨림,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을 가지고서 차에 짐과 나의 몸을 싣고 남은 동기들과 사무소 직원 분들의 배웅을 받으며 호텔을 떠났다. 아직은 스페인어 실력이 많이 짧은 탓에 통성명을 하는 등 짧은 대화만을 간간히 이어가며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나에게 뭐라 뭐라 얘기를 한다. 그나마 알아들은 바에 의하면 가까운 곳에 기관장이 살고 있다고.

  ‘그럼 운전하며 얘기하고 있는 자신, 본인이 그 곳에서 살고 있다는 뜻인가? 내가 잘못 이해했나?’

  말이 짧은 탓에 잘 이해하지도 못했으나 더 이상 묻지도 못하고 가만히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어느 부촌의 근사한 아파트 안에 주차를 하더니 잠시 기다리란다. 아파트의 관리인과 짧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아파트에서 나를 태워준 그 분과 다른 노부부 두 명이 함께 나온다. 상황 파악이 되질 않았다.

  ‘나를 태워준 이 아저씨가 기관장이고 이 두 분은 함께 삐라주 별장에서 머무실 부모님이신가?’

  나를 포함해 총 4명이 차를 타고 삐라주로 향하는 중 나중에 합류한 노부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잠깐 나누고 가던 중 할머니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넌 이제 내 새로운 아들이야. 그리고 난 너의 새로운 엄마고 이 사람(할아버지)는 새로운 아빠야.”

  이 곳, 파라과이의 풍습인지 아니면 코이카 단원들 사이에서 발생한 습관인지 우리 단원들은 홈스테이를 하는 곳의 부부나 머무는 집의 주인 등의 현지인을 마마(엄마)나 빠빠(아빠)라고 부르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노부부가 자신을 엄마, 아빠라고 부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슨 상황일까, 이들은 누구일까, 우린 어딜 향하는 걸까, 여긴 어딘가, 난 누구인가.

  그렇게 폭풍 같은 혼돈과 파악되지 않는 차 안의 상황으로 인해 나 혼자 한껏 고조된 긴장감 속에서 삐라주에 도착하였다. 아직 개간되지 않은 곳들로 둘러싸인 이 곳엔 높아 봤자 2층이 최대 높이인 건물들이 작게나마 오밀조밀 모여 있는 작은 곳이었다. 비록 그 규모는 작으나 혼잡하고 어지러운 아순시온에서 벗어나 도착한 곳이기에 이 곳만의 한적한 분위기와 느낌이 기분 좋게 내 눈으로, 귀로, 바람을 맞는 두 뺨으로 느껴졌다. 삐라주에 와서 바로 먼저 이동한 곳은 앞으로 2년간 내가 일 할 곳인 삐라주 문화센터. 마을 성당 바로 옆에 자리한 이 곳은 그 크기는 작은 1층 주택 두 개 정도 규모의 건물과 공연 또는 간단한 놀이나 스포츠를 즐길 수 있도록 지어 졌고 지붕을 얹기 위해 공사 중인 뒤뜰이 있었다. 내가 탄 차가 도착하고서 마중 나온 두 명의 현지인. 이 사람들은 부부였고 이들 또한 나와 앞으로 함께 일하게 될 이 곳의 직원이었다. 다른 한 명의 직원이 더 있지만 출산 휴가로 인해 출근하고 있지 않은 상황. 그렇게 직원들을 만나 인사를 하는데 이상하게 이 곳까지 운전을 해 온 현지인 남자는 뒤로 조금 빠져있는 상태이고 직원들과 적극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노부부였다.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하던 찰나에 같은 기관에서 활동 중이신 선배단원님이 도착하셨다. 드디어 한국말을 할 수 있는 순간이 온 것이다. 그 분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서 바로 물어보았다.

  “이 두 노부부는 누구신가요?”

  “할머니는 기관장이시고 할아버지는 남편이세요.”

  “그럼 저 분(삐라주까지 운전해 오신 분)은요?”

  “기관장 부부 운전사예요.”

  그렇다. 기관장인줄만 알았던 그 현지인 아저씨는 운전사였고 도중에 합석한 노부부가 기관장 부부였던 것이다. 그제야 의문이 하나 둘 씩 풀려가기 시작했고 기관의 조직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삐라주 문화센터는 기관장이 세운 기관으로 총 직원 세 명과 기관장 부부, 그리고 현지 봉사자 몇 명과 코이카 단원 두 명으로 이루어진 비교적 작은 기관이었다. 기관장 부부는 다른 생업이 있기에 계속 기관에 머물러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한 달에 몇 번씩 들리는 정도로 기관을 찾고 있고 기관에 대한 전체적인 운영은 이 곳 직원인 부부 중 아내가 맡아서 기관을 유지하고 있었다.

  친절한 기관장 부부와 기관의 직원들, 그리고 시골에서 느낄 수 있는 편안함과 느긋함, 서로 모르는 사이임에도 지나가면서 인사를 주고받는 사람들, 또한 도시에선 즐길 수 없는 자연이 존재하는 이 곳. 삐라주에 도착한 첫 날이고 아직 많은 것을 보지 못했지만, 알아가야 할 것들이 무수하지만 왠지 느낌이 좋다. 비록 제대로 된 슈퍼 하나 없는 작은 시골 마을이라 불편함이 있겠지마는 이 곳에서 기분 좋게 2년간 활동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조금씩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