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_27/KOICA_Paraguay

100점 만점에 18점.

daydream187 2013. 11. 30. 00:51

100점 만점에 18점.

  고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받은 적성검사에서 총 6가지 분야 중 가장 높은 흥미도를 보인 분야의 점수는 100점 만점에 18점이었다. 학교 반 친구들이 6개 분야의 흥미도 점수가 모두 높아 진로를 어떤 쪽으로 잡아야 할지 헷갈려 할 때 난 대부분의 분야가 10점을 넘지 못하였고 그나마 가장 높은 점수가 10점을 넘긴 18점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진로에 대해 생각하려 하면 이상하게도 도리어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미래에 대해 그리 걱정도 하지 않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이 없었기에 수능 목표로 정해 놓은 과도 없었다. 그렇다고 대학에 가기 싫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가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다행인 것은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실제로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공부를 제대로 시작했다는 것이다.

  중학생 시절에는 학교에서 일찍 나와 피씨방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아 시험기간을 반기기도 했었다. 그 정도로 내 인생의 활력 대부분을 게임에 쏟아 부었고 자연스레 공부는 뒷전이었다. 감사하게도 부모님께선 공부에 대한 압박을 주시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이따금씩 나에게 한 말씀 하셨다. 집 안에서 컴퓨터만 하지 말고 좀 나가서 놀라고. 또 한 가지 감사한 것은 내 수업시간에는 그나마 열심히 공부했다는 것이다. 내 기억 속에 한해 되돌아보는 것이기에 남이 봤을 땐 그렇게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내 기억으로 돌아봤을 땐 그렇다. 하지만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 다짐을 했었고 컴퓨터에 있는 모든 게임을 삭제했었지만 사실 안 한 것은 아니다. 입학할 땐 각오를 다지기 위해 지우긴 했지만 중간 중간 집에서 쉴 땐 게임도 열심히 했었다. 그런데 막상 열심히 공부하리라 다짐은 했지만 실제로 공부를 시작하려니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몰랐다. 특히 시험공부를. 그래서 첫 시험기간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혼자서 한참을 헤매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조금씩 성적이 올랐고 그 상승세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올라갈 곳이 많았던 만큼 낮은 곳에서 시작을 했다는 말이다. 특별히 가고 싶은 과도 없었고 가지고 싶은 직업도 없었지만 그냥 공부 했다. 평범한 고등학생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냥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한 가지 이유를 말하자면 성적이 오를 때 마다 부모님이 좋아하셨던 것, 그게 하나의 이유였던 것 같기도 하다.

  고등학교 입학 후 시험을 치고 성적표를 부모님께 보여드리니 입학 당시 쳤던 시험 때 보다 석차가 올라 부모님이 좋아하셨다. 근데 가만 생각해 보니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린 적이 없었던 것 같은 거다. 내 기억 속에선 최초로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린 것 같은 거다. 그래서 나도 기뻤다. 성적표를 보여드리며 딱히 부모님이 좋아하실 꺼라 기대를 하진 않았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성적표를 숨기지 않고 부모님께 보여드렸었다. 성적이 엉망이더라도 나에게 꾸중하지도 않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모님께서 참을 인자를 새기며 공부 하라고 닦달도, 성적이 이게 뭐냐고 화도 안 내시고 감정을 꾹 누르며 기다려 주신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아무 기대 없던 상황 중에 부모님이 기뻐하시니 그 자체가 또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것이 고등학교 시절 공부하던 하나의 즐거움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공부를 쭉 해 오다가 고등학생 3학년이 되었다. 이제 정말 무슨 대학의 무슨 과를 가야 할지 정해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별 생각 없이 공부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주변에서 좋은 곳이라고 추천 하던 과, 아버지도 희망하시던 그 과에 내신 성적과 수능 등급을 보는 수시 전형이 있기에 그 곳에 지원해봤다. 다행히 서류에서 합격했다. 그리고 수능을 치고 며칠 뒤 면접을 보러 갔다. 수능 후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찰나 최종 합격 통지를 받았다. 그리고 입학했다. 그 과가 내 평생의 대학 전공이 된 전자공학부인 것이다. 그 외에는 지원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냥 이 곳이 좋다기에 지원했고, 합격했다. 사실 난 고등학교를 졸업 할 때 까지 전 과목 중에서 수학을 가장 못했다. 수능에서도 수리영역의 등급이 가장 낮았다. 그런데도 그냥 공대를 갔다. 그 곳 말고 딱히 가고 싶은 곳이 없었기에 그냥 갔다. 공대의 특성상 공부의 양이 엄청나고 난이도도 워낙 어려운지라 적성이 맞지 않아 반수, 재수 하는 학생들이 많았지만 다행히도 내 적성에 어느 정도 맞았고 모든 과목이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흥미롭고 재미있는 과목도 있었다. 이것도 참 감사한 일이다. 내 적성에 맞지 않았다면 청소년 시절에도 하지 않은 방황을 대학 입학 후 했을지도 모르니. 어쨌든 그렇게 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 입학 후 목표가 있었다. 많은 걸 해 보자. 어머니의 교육방식도 그랬다. “나쁜 것 빼고 다 해봐라. ‘왜?’라는 질문을 던져라.” 그래서 새내기 시절 집을 나와 많은 시간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찔러보며 다녔었다. 아르바이트, 동아리, 과 생활, 그러던 와중에 활동하던 기독교 동아리에서 3주간 인도를 다녀오게 되었다. 1년간의 새내기 생활이 끝나고 다음 해 1월 초 동아리 사람들과 함께 인도로 떠나게 된 것이다.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탔고, 해외를 경험하게 되었다.

  인도.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했다. 바닥에 피어있는 들꽃에서부터 하늘의 구름까지 모든 게 한국과는 달라보였다. 그 다름 속에서 때론 적응 되지 않아 피곤할 때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삶의 모습과 문화, 환경의 다름 속에서 물씬 배어 나오는 사람들의 살아 움직이는 힘이 지금껏 살아온 환경이 세상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려는 듯 나의 근본을 뒤흔들며 나쁘지만은 충격 속에서 인도에서의 하루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다 한 번은 철거되기 직전의 빈민촌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철거가 잠깐 남았기에 기존의 삶의 방식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조차도 나의 눈엔 너무 힘겨운 삶으로 보였다. 그들은 건강에 극히 위험한 정도의 위생 상태 속에서 전기, 가스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고 좁디좁은 골목엔 수많은 집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이 곳이 대학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해 고민 할 때에 머릿속에 떠오르던 그 곳이다. 잊을 수 없는 그 아이들의 눈빛이 존재하던 그 곳이다. 내 인생에 진한 충격과 기억을 남기며 잊을 수 없는 인도에서의 3주가 흘렀고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렇게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었던 인도.

  1월 말일에 인도에서 돌아왔고 입대 날짜가 4월 12일로 잡혀 있었지만 다시 한 번 내 힘으로, 나 혼자 해외로 나가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인도에서 귀국하자마자 한 달 반가량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아무의 도움도 없이, 정해진 일정과 숙소도 없이 달랑 여권 하나와 여행책, 아르바이트로 벌어 놓은 노잣돈을 움켜쥐고서 입대 2주 전 부산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입대 1주일 전 무사 귀국하여 대충 신변을 정리한 뒤 군에 입대했다.

  인도를 다녀온 뒤 내 삶이 뭔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그 이후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에 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계 많은 곳을 다니며 보고 듣고 경험하고 생각하고 싶단 욕구가 솟구쳤다.

  조금 과장한다면, 가장 큰 변화는 - 모든 것이 하기 싫던 나, 모든 것이 하고 싶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