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 볼리비아, 우유니 → 볼리비아, 라파스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졌지만 오늘 새벽도 엄청난 두통으로 인해 몇 번을 깼다가 잠들었다. 그러기를 반복하던 중 어느새 해가 뜨고 아침이 밝았다. 해가 밝는 것 마냥 내 머리에도 광명이 찾아와 두통을 쫓아내주면 좋으련만 찾아오는 것이라곤 지끈거리는 괴로움뿐이었다. 이 상태라면 어젯밤 일출 투어 신청에 성공했더라도 그 투어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곤욕이었을 거라 생각하니 일출 투어를 하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어제 우유니 사막 투어 중 오후에 상태가 조금씩 나아진다고 몸을 많이 움직였던 것이 화근이었을까, 아님 아직 적응이 덜 된 것일까. 그 와중에 다행이었던 것은 허리 통증은 사라졌다는 것. 아무튼 지긋지긋한 두통과 함께 하루가 시작되었다.
한 동안 계속 침대에 누워 쉬고 싶었으나 오늘 밤 라파스로 떠나기 위한 버스 티켓이 혹시나 매진되거나 좋지 않은 자리만 남아있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일찍 터미널로 가서 표를 끊기로 하였다. 어제도 제대로 씻지 않은데다가 투어를 한 후 온갖 먼지와 소금기로 범벅이 된 내 몸은 나 자신조차도 너무 더럽게 느껴질 정도였기에 머리를 감고 세수라도 할 양으로 두통으로 가득한 머리를 일으키고 몸을 세워 터덜터덜 세면실로 걸어갔다. 영화에 나오는 좀비마냥 어깨 관절의 움직임은 최소로 한 채 팔꿈치를 겨우 굽혀 힘 풀린 손가락들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손을 들어 올린 뒤 세면대 수도 밸브에 턱 하고 올려놓았다. 힘을 내어 수도밸브를 부여잡고 반시계 방향으로 조금씩 돌렸다. 조금씩, 조금씩 돌렸으나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두통을 참아내면서까지 세면실로 걸어와 수도 밸브를 돌려낸 씻고자 하는 나의 거대한 열망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도꼭지에서는 요상한 바람소리만 들려왔다. 정승마냥 세면대 앞에 멀뚱히 서서 그 요상한 바람소리를 들으며 물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중 저 멀리 아련한 대화소리가 들려온다.
“물 안 나와!”
이곳에 머물고 있는 여행자 한 사람이 소리쳤다.
“조금만 기다려 곧 나올 거야~”
이곳 직원이 소리쳤다.
‘곧 나올 거야’, 나에겐 ‘너 오늘 씻긴 글렀어~’라는 말로 들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수도꼭지를 멍하니 바라보며 한 줄기의 물을 기다렸으나 여전히 공기를 토해내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허무한 마음을 달래며 방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머리에 최대한 충격을 주지 않을 목적으로 한 마리의 거북이가 되어 느릿느릿 옷을 입고 짐을 챙기고 모자를 쓰고 방에서 거울을 보며 눈곱을 떼고 건조한 공기로 인해 우유니 소금 사막 마냥 바짝 마른 입술에 보습제를 덕지덕지 바른 뒤 거리로 나섰다.
오늘도 무섭도록 따갑고 뜨거운 햇살이 내려쬐고 있다. 모자의 챙으로 만들어진 작은 그늘 속에 숨기 위해 몰래 다니는 범죄자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아주 느린 걸음과 깊은 호흡을 하며 라파스행 버스 티켓을 사기 위해 움직였다. 인터넷의 여행자 포럼에서 누군가가 추천한 버스 회사 사무실로 들어가 저녁에 출발하여 다음날 아침 일찍 도착하는 버스 티켓을 샀다. 그 아픈 와중에도 이동 중의 경치를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2층 맨 앞좌석을 구매했다. 버스가 출발하는 시간까지는 한참 남아있었다. 생각 같아선 숙소의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다가 버스를 타고 싶었으나 체크아웃을 해야 했고 그래서 숙소로 돌아가 짐을 정리하고 체크아웃을 하며 짐을 맡겨놓은 뒤 다시 나왔다.
배는 별로 고프지 않았으나 인터넷도 좀 해야 했고 공복으로 있으면 몸에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아 식당으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좋은 가격에 좋은 장소에서 편히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에 철근 같은 몸을 질질 끌며 이런 저런 식당을 돌아다니다가 한 곳을 정하여 들어갔다. 식당은 조용하고 쾌적했으나 메뉴가 생각보다 비쌌다. 하지만 오랜 시간 있을 생각이었기에 인터넷만 된다면 좀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할 생각이었다. 와이파이가 있는지 직원에게 물어보았다.
“식사 메뉴 주문시에만 사용 할 수 있어요.”
어차피 아침 식사 메뉴를 먹을 생각이었기에 문제가 없었으나 와이파이 이용을 비싼 메뉴에만 제한한 좀스러움에 조금 언짢았다. 어쨌든 자리를 잡고 메뉴를 주문하고서 직원에게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물어보았다.
“비밀번호는 알려 줄 수 없어요. 제가 직접 입력해 드릴게요.”
그 좀스러움에 이젠 짜증도 조금 났다. 스마트폰을 넘겨 비밀번호를 입력 받았고 가지고 있던 태블릿도 와이파이를 쓰기 위해 직원에게 비밀번호 입력을 부탁하며 넘겼다.
“한 사람 당 한 기계만 와이파이에 연결 할 수 있어요.”
이젠 짜증에다가 화까지 날 지경이다. 그러면 스마트폰은 와이파이를 끌 테니 태블릿에 연결시켜달라고 하고서 비밀번호 입력을 받았다. 기분을 가라앉히며 자리를 잡고 인터넷을 조금 하고 있으니 식사가 나왔다. 밥을 먹으며 뭘 하긴 힘이 들어 먼저 밥을 다 먹기로 했다. 몸은 아팠으나, 식욕도 그다지 없었으나 음식을 들어 입 앞에 가져가니 아무런 거부 반응도 없이 음식이 술술 잘도 넘어간다. 내가 봐도 참 대단한 식성이다 싶었다. 밥을 다 먹고 빈 테이블로 자리를 잡고 있기엔 좀 민망해서 음료를 한 잔 시켰다. 음료 역시 비쌌으나 인터넷을 하며 좀 오랜 시간 있을 생각이었기에 가격을 부담하기로 했다. 음료를 주문하고 인터넷을 좀 하려는데, 와이파이 신호가 끊겼다. 파라과이에서도 불안정한 인터넷 상황으로 인해 와이파이 신호가 오락가락 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기에 별 다른 생각 없이 오늘 아침 수도꼭지를 바라보며 물줄기를 기다렸던 것 마냥 와이파이 신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참다못해 종업원을 불러 왜 와이파이가 되지 않는지 물어보았다.
“음... 어.... 배터리가 없어요.”
본래 숫기가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으나 와이파이에 대해 물어보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배터리가 없다는 이상한 대답을 대충 얼버무리며 툭 던져놓고선 도망치듯 돌아가 버렸다. 공유기에 전원을 연결하기 위해선 어댑터를 통해 전기 코드를 항상 꽂아놓아야 하는데 정전도 되지 않은 이 상황에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내가 모르는 배터리 충전식 공유기가 있는 것인가. 눈도 제대로 보지 않고 대충 대답하는 종업원과 이해가 되지 않는 답변을 듣고 나니 와이파이 신호가 끊긴 이유에 대해 다시 아니 돌아볼 수가 없었다. 신호가 끊긴 순간은 내가 아침 식사를 다 끝낸 직후였다. 설마... 내가 아침을 다 먹었다고 고의로 신호를 끊은 것인가!? 안 그래도 머리가 아파 죽겠는데 생각만 해도 짜증이 샘솟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선 더 자세히 생각하기 싫었다. 일단 인터넷 연결 없이도 할 일들이 있었기에 그 일들을 우선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론 식사 주문을 하고 와이파이 사용을 요구하는 다른 손님이 오기를 바랐다. 그때 와이파이가 돌아온다면 고의로 신호를 끊은 것이었을 테고 그렇다면 혹시나 하던 가설이 역시나 하는 사실이 됨으로 인해 퐁퐁 샘솟던 짜증이 폭발하여 지나가던 비행기마저 추락시켜 버릴지도 모르는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르지만 어찌 됐든 나는 다시 인터넷에 연결할 수 있게 될 테니까.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식당에 들어오는 손님은 잠시 메뉴를 보고 원하는 게 없어서 발길을 다시 돌린 한 테이블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그렇게 잠깐의 인터넷을 위해 비싼 돈을 쓴 현실에 대해 허탈해 하며 길거리로 다시 나왔다. 식당에서 한참을 있다가 나왔으나 아침 일찍 길로 나선 터라 해는 이제야 중천에 떠서 햇볕을 정수리에 뜨겁게 내리 꽂고 있었다.
몸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오래 앉아 뭔가에 집중하고 있었던 탓인지 식당에 들어가기 전 천천히 다닐 때 호전되었었던 고산 증세는 다시 악화되어 나에게 강한 두통과 어지럼증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숙소도 체크아웃 했겠다 몸 뉘어 쉴 곳이 없던 나는 그냥 천천히 걸으며 우유니 마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우유니는 매우 작은 마을이라고 들었었으나 파라과이의 정말 시골에서 살고 있는 탓인지 생각 했던 것 보다 이 곳은 큰 마을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를 지나 시장을 가로질렀고 더욱 걸어가 군부대를 끼고서 돈 다음 기찻길을 따라 조금 걷다가 다시 식당과 여행사가 밀집되어 있는 번화가로 돌아 왔다.
이 곳, 볼리비아에는 아직도 전통 복장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많고 오래된 방식으로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 묶은 여자들도 많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편협한 시각일지도 모르겠으나 볼리비아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파라과이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었기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파라과이는 마떼와 떼레레를 마시기 위해 들고 다니는 물통과 컵이 있다. 그리고 토착어인 과라니어를 공식 언어로 지정하고 다른 중남미 국가보다 훨씬 높은 비율로 토착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것들이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할 수 도 있으나 이 요소들로부터 파라과이만의 뿌리를 찾아보긴 힘들었다. 그들의 의식주, 생활양식, 문화 등 모든 삶의 부분에 강대국의 영향이 스며들고 있었으며 그렇게 점차 정체성을 잃어가는 것만 같이 보였다. 버스가 잘 들어오지 않는 시골을 가더라도 생활의 불편함과 보편적인 가난이 보일 뿐 전통적인 무엇인가들이 눈에 들어오진 않았다. 그렇게 서양 문물의 강제적이고 탄압적인 경제적, 문화적 식민화 앞에 뿌리를 잃어가는 것만 같은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많았다. 볼리비아 역시 이러한 위기 앞에서 도망칠 순 없으나 길에서 볼 수 있는 전통 복장과 오래된 건물 등 문화유산을 지키고자 하는 그들의 모습에서부터 여전히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뿌리를 곳곳에서 느낄 수 가 있었다.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나서 어제 아침 식사를 했던 그 곳에서 어쩌면 두통을 완화시켜줄 지도 모르는 코카차를 한 사발 하며 쉬고 싶어 그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문은 닫혀 있었고 길 잃은 어린 양 마냥 다시 발길을 돌려 마을 중심가를 기준으로 주변을 돌아다녔다. 아침을 먹은 식당에서 나온 뒤 동네를 다닐 때에 나름 천천히 다닌다고 다녔는데 그것도 지금 내 몸 상태엔 무리였는지 갈수록 두통이 심해졌다. 들고 다니던 물도 다 마셨고 수분을 섭취 할 겸 주스를 마시면 나아질까 하는 생각에 어머니와 아들로 보이는 두 명이 일하고 있던 길가 손수레 주스 판매대에 멈춰 망고와 우유를 갈아 만든 음료를 주문했다. 음료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서 있던 것도 이젠 힘들어져서 근처에 있던 벤치에 앉아 있겠다고 이야기 하고서 자리를 잡았다. 두통을 진정시키기 위해 최대한 몸의 움직임을 자제하며 심호흡을 반복하였다. 곧 유리잔에 담겨져 있는 주스를 건네받고 천천히 마시며 쉬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구름이 거의 없는 쨍한 하늘이 있었고 너무나 강한 햇살 탓에 그 하늘빛이 흰 빛을 띠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어느새 주스를 다 마시고 빈 잔만 들고 멍하게 있으니 가게 아주머니께서 다른 손님의 주문을 받아 만들고서 남은 주스가 들어있는 믹서를 들고 오더니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한 마디의 말도 없이 무심하게 내 빈 잔에 그 남은 주스를 부어 주었다.
“그라시아스”
고맙단 말을 하고서 한 모금 마셔보니 파파야 주스인 듯하다. 냉담한 친절함이 담겨 있는 주스도 모두 마시고서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길을 나섰다.
잠깐 쉬었지만 두통에 그다지 도움이 되질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다시 공원에 있는 한 벤치에 앉았다. 깊은 심호흡을 반복하며 술에 취한 사람이 잠시 쉬려 앉아 있는 것처럼 약간은 초점이 풀려있을지도 모르는 눈을 하고서 멍하니, 별 생각도 없이 그러고 앉아 쉬었다. 벤치에 눕고 싶은 욕구가 강했으나 잠이 들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낮잠이 오는 것은 고산 증세 중 하나일 수 있고 그것을 받아 쳐내지 않고 잠이 오는 족족 그대로 잠을 자버리는 것은 고산에 적응하는데 좋지 않다는 것을 본 기억이 떠올라 겨우 참아내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렇게 하릴 없이 앉아 있다 보니 어느 순간 두통이 조금씩 완화되며 이젠 좀 움직일 수 있겠다 싶은 상태로 돌아왔다. 시계를 보니 한 시간 좀 넘게 쉰 듯하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본래 가려고 했던, 어제 아침을 먹었던 식당이 열렸을까 싶어 그곳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식당 문이 열려 있다. 그런데 입구에 들어서니 너무 조용하고 분위기가 허전하다. 막상 들어가기가 뻘쭘해져 입구에서 기웃거리고 있으니 어느 한 아저씨가 나오더니 무슨 일이냐고 물어본다.
“차 한 잔 마시고 싶어서요.”
“차만 마실 거야?”
“네. 안되나요?”
“잠시만 기다려봐.”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다른 누군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그 둘이 같이 나왔다.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어제 아침을 먹을 때 보았던 이 곳에서 일하시는 할머니였다. 할머니께 다시 여쭤봤다.
“차 마실 수 있나요?”
“응. 들어와.”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들어올 때 느꼈던 분위기대로 아무도 없이 조용하고 차분한 기운만이 감돌뿐이었다. 알고 보니 이 곳은 식당만 운영하는 게 아니라 여행객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유료 샤워실과 세탁기도 갖추고 있었고 내가 갔던 시간은 식당은 운영하지 않고 이 시설들만 운영하던 때였다. 자리를 잡고 코카차를 주문했다. 역시 기대대로 어제마냥 차 한 잔만 주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물이 가득 들어 있는 도자기로 된 주전자 하나와 코카잎이 가득 들어 있는 찻잔을 내어 왔다. 가격도 저렴했다. 차를 내주고서는 할머니는 그냥 가 버리신다. 본래 식당 운영 시간이 아니라 그냥 가버리시는 듯 했다. 가게에 일하는 사람도 없이 혼자 있다는 것이 뭔가 어색하고 난감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오히려 더 편안해 졌다. 와이파이는 없지만 오늘 아침에 갔던 그 비싸고 좀스럽고 속물 같던 식당과 비교하면 가격도 훨씬 저렴하고 분위기도 더욱 좋았다. 게다가 도서관 마냥 외부와는 닫혀 있는 아늑한 공간에 나 혼자밖에 없었기에 더더욱 좋았다. 에라이 망해라 그 가게. 퉤퉤.
남은 일정 계획도 잡고 일기도 쓰고 이것저것 생각도 하며 있다 보니 생각 보다 오랜 시간을 보내었다. 가끔 일하는 할머니께서 들어오실 때 코카차 한 잔, 아니 한 주전자, 그리고 사과 주스까지 세 음료나 주문했다. 그러나 가격이 저렴했고 양도 푸짐한데다 사과 주스는 신선하고 맛도 좋았기에 별 부담은 없었다. 그렇게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백인 여행자가 들어왔다. 유료 샤워 시설을 사용하러 온 사람이었다. 그냥 그런가 하고 다시 내 일에 집중하고 있는데 일하는 할머니와 이 곳에서 들어올 때 처음 만났던 아저씨가 들어오더니 샤워를 하고 있던 여행자에게 물었다.
“뜨거운 물 나와?”
“What?" - 스페인어를 못하는 여행자였다.
“뜨거운~ 물~ 나와~?” - 천천히 다시 한 번 물었다.
“Sorry?" - 여전히 스페인어를 못했다.
어휘를 바꿔가며 몇 번을 재차 물었으나 여행자는 알아듣지 못했다. 할머니와 아저씨가 뭐라 뭐라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 소통이 안되는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를 논의하는 듯 했다. 혹시나 내가 도움이 될 까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가니 할머니께서 나더러 뜨거운 물 나오는지 물어봐 줄 수 있느냐고 말씀하신다. 내가 샤워를 하고 있는 여행자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음... 뜨거운 물 나와요?” - 영어로 더듬더듬 거리며 이야기 했다.
“어... 그럭저럭 나와요.”
그럭저럭 나온다고 할머니께 말을 하니 수도꼭지를 너무 끝까지 틀지 말고 적당히 틀면 물이 더 뜨겁게 나온다고 전해달라신다.
“에... 수도꼭지를 너무 틀지 말고 조금만 틀면 더 뜨겁게 나올거에요.”
“오케이. 땡스 맨!”
이야기를 다 전하고 나니 할머니께서 고맙다고 말씀하신다. 정말 별 것 아니지만 이렇게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나도 소용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확인 되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인 것 같다.
쉬는 동안 다행히 몸 상태는 많이 좋아졌다. 이제 라파스행 버스 탑승 시간이 그리 멀지 않았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오늘 체크아웃 하면서 맡겼던 짐을 찾을 겸 로비에서 잠깐 쉬며 인터넷도 할 겸 해서 머물렀던 숙소로 이동했다. 로비의 쇼파에 앉아서 인터넷을 하고 있는데 여행 중인 한국인 분들이 들어왔다. 그런데 체크인 하는 과정에 있어서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아 약간의 갈등이 빚어지는 듯 했다. 로비에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다가가서 도와드릴까요 라고 물어본 뒤 서로 대화가 통할 수 있게 조금 도와드렸다. 소통이 되고 나니 문제가 해결 되었고 한국 분들이 고맙다는 말을 전해 왔다. 이렇게 또 도움이 되니 조금은 으쓱해졌다.
이제 짐을 챙기고 버스를 탑승하러 나섰다. 식욕은 그다지 없었으나 생각해보니 오늘 먹은 밥이라곤 아침 식사 밖에 없었기에 억지로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아서 길에서 햄버거 하나를 사 먹었다. 그런데 막상 손에 햄버거가 쥐이니 상황이 달라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식욕이 돌아왔고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공복 상태가 절실히 느껴졌다. 내가 몸 상태가 좋지 못한 사람이라고는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그리고 맛깔나게 먹었다. 누가 보면 광고 찍는 줄.
버스는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고 티켓 검사를 받은 뒤 예약한 좌석인 2층 좌측 맨 앞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버스의 좌석 배치는 한국의 고급 시외버스처럼 좌측에 좌석 두 개, 우측에 한 개가 있는 식이었고 내 자리는 좌석이 하나만 있는 쪽이어서 좌우의 다른 승객을 신경 쓸 필요 없이 편하게 앉을 수 있었다. 곧 버스는 출발하였고 천천히 산을 오르며 우유니를 벗어났다. 골짜기를 따라, 이리저리 굽이치는 길을 따라 달리는 차는 도시를 멀리하면서 주변에는 서서히 불빛이 하나 둘 씩 사라졌다. 사람이 만들어 낸 빛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을 때에 창밖의 하늘을 보니 자연이 만들어 낸 빛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밝기로 항상 있었을 별들이 주변의 시끄러운 빛들이 사라지자 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밤하늘에 촘촘히 박혀 있었다. 깊은 밤이 아니었고 달도 거의 보름달인 상태였으나 별들은 아랑곳 않고 밝게 빛나고 있었다. 멍하니 고개를 돌려 창밖의 별들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는 사이 그렇게 잠이 들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