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ber와 Conocer
그리 많진 않지만 의도치 않게 몇몇 언어들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배운 적이 있다. 영어는 한국의 요즘 젊은이라면 배워야 할 필수 교과목이기에 당연히 배워왔다. 고등학교 시절엔 제 2 외국어로 일본어를 한 학기 동안 배웠었고 대학교 새내기 시절엔 중국어 수업을 한 학기 동안 수강 했었다. 그리고 헝가리에서 교환 학생으로 지내는 한 한기동안 헝가리어 수업도 들었었다. 이런 저런 외국어를 접하다 보니 각 언어마다 가진 특색이 있었고 이를 좀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선 언어 그 자체뿐만 아니라 문화, 역사, 경제 등 그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이들의 삶의 배경에 대해 두루 알아야 하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공부를 하며 한국인의 보편적인 정서와 상식만으로는 다른 언어를 깊게 이해하기가 힘들었고 당연히 습득하는 데에도 이런저런 걸림돌들을 만나게 되었다.
스페인어는 한국어와는 전혀 다른 라틴어를 뿌리로 삼고 있기 때문에 한국인으로서 헷갈리는 개념들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그 많은 개념들 중 하나인 Saber라는 동사와 Conocer라는 동사는 나로 하여금 헷갈리게도 하고 많은 생각을 하게끔 만들기도 한다. 좀 더 깊게 들어가기 전에 이 글을 쓰는 지금 필자의 마음을 나타내자면 사실 내가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지, 올바르게 스페인어를 쓸 수 있을지, 행여 잘못된 정보를 나누게 되진 않을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중 혹시 잘못된 부분을 발견한 분이 계시다면 알려주시길 바란다. 아무튼 최대한 올바른 정보를 써내려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니 어쨌거나 저쨌거나 시작해보자. Saber와 Conocer 모두 한국어로 해석하자면 '알다'라는 동일한 단어로 해석될 때가 많지만 스페인어에 있어선 두 단어의 의미가 확연히 다를 때가 많다. 사전을 찾아보면 각 단어가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지만 그 중 두 단어가 또렷이 구분되는 부분은 Saber는 그냥 단순히 '알다', 문자 그대로 아는 것을 이야기 하고자 할 때 사용되지만 Conocer의 경우 '경험을 통해 알다'라고 표현할 때 사용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독일을 안다. 하지만 나는 독일을 모른다(Yo sé Alemania. Pero Yo no conozco Alemania)'
한국어만 보자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이젠 한국어는 무시하고 스페인어에만 집중해 보자.
'Yo(나) / sé(saber 동사) / Alemania(독일). / Pero(그러나) / yo(나) / no(부정의 뜻) conozco(conocer 동사) Alemania(독일)' (스페인어는 시점, 인칭 등에 따라 동사의 형태가 변한다).
각 단어의 뜻은 위와 같다. 이젠 동사만 남겨두고 해석을 해보자. '나는 독일을 Saber한다. 하지만 나는 독일을 Conocer 하지 못 한다' 정도가 되겠다. 위에 설명한대로 Saber는 단순히 아는 것, Conocer는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이므로 이를 남아있는 스페인어에 적용해 본다면 위 문장의 주어는 '독일이라는 나라를 안다. 하지만 직접 가보진(경험해 보진) 못했다.'가 될 수 있겠다.
이토록 Saber와 Conocer는 스페인어 상에서는 그 뜻이 차이가 나지만 한국어에선 풍문으로 아는 것과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을 각각 표현하는 단어가 없기에 그냥 똑같이 '알다'라는 한 단어로 해석될 수 있다. 아직까지도 나를 헷갈리게 만들고 힘들게 만드는 단어이지만 처음 접하고 난 뒤 이 두 단어의 차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난 이후엔 많은 것을 경험해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었다. 그 욕심에 충실히 살아보고자 각종 아르바이트, 대외 활동, 여행 등을 했었고 이를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체험하려고 노력했었다. 스페인어 상에서 보자면 난 Saber 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난 Conocer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발로 직접 뛰며 경험을 해 볼 때에 평소에 그냥 알던 것과 직접 체험을 통해 아는 것에는 분명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런 경험을 통해 문자나 이야기로 듣는 것들을 전부로 여기지 않고 이 것들은 일부분일 뿐이며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부분이 존재할 것이라는 여지를 항상 한켠에 두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여전히 부족하나마 이런 여백을 둠으로써 예전보다 판단의 여유가 생긴 것 같다. 그 채워지지 않은 공간을 통해 내가 오해하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 나의 주장이 편견일 수도 있다는 생각, 나의 가치관이 다른 이들과 다를 수 있다는 생각, 우선순위가 다를 수 있다는 생각 등 이러한 의심들을 그 여백에 채워둠으로써 세상을, 사람들을 좀 더 이해하려 하고 양보하려 하는 마음, 너의 판단이 틀림이 아니라 나의 판단과의 다름일 수 도 있다는 마음을 좀 더 가질 수 있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끔 나의 모습을 되돌아 볼 때 내가 모르는 부분에 대한 여백을 두려는 태도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러울 때가 있다. 언젠가부터 생각이 굳어지고 내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드는 것 같아 소위 말하는 꼬장꼬장 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운 것이다. 스페인어 공부를 하며 Saber와 Conocer를 마주쳤을 때 또한 혹시 예전에 경험을 통해 더 깊이 알아보고자 했던 그 열정들이 어딜 가버린 것은 아닌지, 어디서 주워들은 것들로만 행여 내 지식을 채우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경계하며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된 것이다.
난 여전히 Conocer를 원하는가, 아니면 Saber에서 그치고자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