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앞에 사람들이 보였다. 많은 사람들. 파라과이인이 아닌 한국인들. 낯이 익은 사람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인사를 하기 시작한다. 오랜 만에 만난 듯 평소에 나누는 가벼운 인사와는 달리 더욱 반가워 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있다. 한 명 한 명 인사를 나누다가 어느 순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교회 청년부 예배 후 광고 시간에 앞에 나가있는 듯 한 모습이다. 손엔 마이크가 쥐어져 있다. 나의 눈 앞엔 익숙한 의자에 익숙한 사람들이 앉아서 나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 한다.
"2년의 활동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난 파라과이에서 2년간의 코이카 봉사단원 활동을 마치고서 사람들에게 귀국 인사를 나누고 있다. 오랜만의 귀국이라 사람들을 만나며 인사를 나누고 한국으로의 복귀를 환영받고 있다. 하지만 뭔가가 이상했다. 찝찝한 무엇인가가, 응어리 같은 그 무언가가 떼어낼 수 없는 불편한 존재가 되어 내 가슴 아래를 무거운 돌덩이 마냥 짓누르고 있다.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고 있지만, 그리운 한국의 모습을 보고 있지만, 편하지 않다. 기쁨이 기쁨으로 끝나지 않고 무엇인가 잔류물을 남기며 나를 괴롭히는게 무엇인지 찾기 위해 나의 감정을 되돌아 본다. 기쁨 이외에 어떤 감정이 나를 채우고 있는가. 슬픔. 분명 난 웃고 있다. 사람들을 만나고 내가 경험했던 것들을 이야기 하며 웃고 있다. 하지만 슬펐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표출하지 않기 위해 웃으며 사람들을 대하고 있다. 하지만 나 자신을 속일순 없다. 이젠 슬프다 못해 괴로운 느낌마저 드는 듯 하다. 어느샌가 부터 머리 속으론 같은 생각이 계속 맴돌고 있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
정말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 듯 하다. 예상치 못한 일로 인한 갑작스러운 귀국처럼 느껴진다. 내 감정을 곱씹을수록,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수록 아쉬움과 슬픔, 그리고 일종의 그리움 같은 것들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그 감정들이, 폭우로 인해 흘러 넘치는 강물을 어떻게든 막아보려 만들어 놓은 약하디 약한 둑이 강한 물살을 견디지 못하고 작은 균열과 함께 한 순간 모두 무너지듯이 내 속에서 커져가는 슬픔, 괴로움, 그리움들을 더 이상 막지 못하고 씁쓸한 웃음을 지은 내 표정 위에 어느새 생기기 시작한 작은 균열을 통해 결국 그 감정들이 폭발하듯 밖으로 나오려 할 때에,
눈을 떴다. 난 누워있었고 아침 햇살을 받으며 슬픔이 가득한 마음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한동안 멍하니 눈만 굴리며 조심스레 주변을 살펴보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고 난 꿈에서 깨어나 파견된 지 4개월이 조금 넘은 이 순간 난 삐라주의 내 작은 침대 위에서 눈을 뜨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겪은 것은 꿈이었다. 그러한 상황을 파악하게 된 순간 아직 파라과이에 있음이 감사해졌다. 너무나 빨리 귀국한 듯한 아쉬움 속에서 다시 돌아와 아직 나에게 이 곳에서 지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 지난 4개월 간의 나의 모습을 돌아보고 다시 활동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되돌아 보면 정말 4개월이란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 듯 하다. 이렇게 지내다가는 눈 깜짝할 사이에 2년이 거짓말처럼 흘러갈 것만 같다. 아직 파라과이를 맘껏 사랑하지 못했다. 이렇게 돌아가긴 싫다. 너무 싫다. 서투른 언어에 아직 현지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부분들이 많이 있지만 난 좀 더 파라과이에 머물며 이 곳을 사랑하고 싶다. 꿈을 깨며 느낀 슬픔, 괴로움, 아쉬움 같은 감정들을 잊지 않으려 한다. 그 어두운 감정들을 고이 모아 놓았다가 힘들어 질 때에, 나태해 질 때에 조금씩 꺼내보려 한다. 순식간에 지나 가버린 2년 뒤 내가 느낄 감정들이 고이 모아 놓은 감정들과 동일하질 않길 바라며, 꿈에서 품었던 그 어둠들이 현실이 되질 않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