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내음 물씬 풍기는 햇살 아래 거침없이 달리는 버스 안에서 거침없이 달리는 버스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참 많은 생각들을 하며, 다짐을 하며 그리고 어김없이 졸며 인천공항으로 향하였다. 가장 먼저 공항에 도착한 나는 우선 저울이 있는 곳을 찾아가 내 수화물의 무게를 달아 추가 요금 없이 보낼 수 있는 수화물의 기준에 합당한지 확인부터 하였다. 어느 정도의 오차를 예상하고 집에서 체중계로 무게를 달아봤음에도 생각보다 너무 많은 무게가 오버 되었다. 긴급 조치에 돌입했다. 조용하고 한적한 구석으로 이동해 짐들을 풀어놓고 많은 시간과 힘을 투자하여 이리저리 헤집으며 짐의 무게를 다시 분배해 본다. 그리고 다시 저울로 이동해 무게를 달아 보았다. 그래도 제한을 넘었다. 조금씩 짜증이 몰려온다. 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해 적당한 무게의 짐을 가방 속에서 빼냈다가 꾸역꾸역 넣었다가를 반복하며 제한을 넘지 않도록 배분을 해 본다. 그래도 조금 오버가 되어버린다. 더욱 밀려오는 짜증에 오버되어버린 무게만큼의 짐을 빼내어 기내로 가지고 들어갈 가방에 쑤셔 넣고 구겨 넣어버린다. 그렇게 짐을 대충 정리하는 중에 함께 파라과이로 동기들이 가족, 친구 또는 홀로 공항으로 한두 명씩 도착하기 시작한다. 먼저 도착해 짐 정리를 끝낸 나는 다른 동기들의 짐 정리를 돕기도 하고 아직 출국하지 않은 마중 나온 동기들과 인사하며 한국에서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약속한 시간이 다 지났음에도 단원 한 명이 오질 않아 기다리다 전화를 해 보니 당일 아침에만 해도 되던 통화가 공항에 오는 길에 2년의 공백을 위해 해지 해놓았는지 없는 전화번호라는 안내만이 휴대폰으로 흘러나온다. 연락할 방법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초조하게 기다릴 수 없는 상황. 하지만 다행히도 출국 수속을 밟는 데에 문제가 없는 시간에 도착하여 예정된 과정을 밟기 시작한다.
그러는 와중에도 한국에서의 남은 시간은 결코 멈춤이 없이, 느림도 빠름도 없이 자기만의 속도로 흘러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남은 시간이 줄어듦이 아쉬운 탓인지 가족, 친구들과 함께 나온 단원들은 그들과 아직은 함께하고 있음에도 앞으로 맞딱드리게 될, 아니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르는 서로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이 점점 깊어져만 가는 것이 그들의 눈빛과 공항의 경직되는 공기 속에서 나에게도 느껴진다. 아쉬운 시간은 야속하게도 태연하게 흘러버리고 이젠 마중 나온 이들과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순간 더욱 무거워지는 분위기, 그리고 슬픔들.
2년. 2년간 군대를 다녀왔음에도 2년이란 시간이 어떠한 길이이고 크기이고 무게인지, 내 인생에 그리고 다른 이의 인생에 어떠한 의미로 다가올지 머리에도, 가슴에도 와 닿질 않는다. 그러나 딱 한 가지만은 지금 이 순간 내 가슴속에 확실한 의미가 되어 내리 꽂힌다.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 또는 슬픔. 오지 않기를 바라던 헤어짐의 시간이 다가온 순간 서로 억누르고 있던 감정들이 폭발하여 눈물로 흘러내리고 행여 놓칠세라 서로의 두 손을 꼭 마주잡고 또는 서로를 끌어 않고 아쉬움을 토해낸다. 대구에서 홀로 온 나는 멍하니 그 들의 헤어짐을 텁텁하게 바라보고 있었고 공항에 마중 나온 중년의 동기 형님들께서 나의 텁텁함을 알아보시곤 따뜻한 포옹으로 나를 어루만져 주신다. 모든 것이 아쉽지만 이젠 정말 헤어져야 할 시간.
무엇을 하든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수색대를 지나 출국 심사대를 거쳐 다시 모이게 된 우리 파라과이 팀. 감정을 추스르고 그리고 진정시키고 오랜 장거리 비행에 대비하기 위해 코이카에서 받은 단복을 벗고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아쉬움은 아쉬움이고 쇼핑은 쇼핑이다. 눈물을 닦고 비행기 탑승까지 남은 시간동안 면세점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내고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인천에서 미국 LA을 거쳐 브라질 상 파울로로, 그리고 상 파울로에서 아순시온으로 비행기를 두 번 갈아타고 비행기에서만 보내야 할 예정 시간이 총 24시간 15분이다. 정말 곤욕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LA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상 파울로로 향할 때 타고 가는 게 우리나라 국적기인데다 좋은 비행기라는 것이다.
예정대로 LA에 도착하여 2시간 25분의 경유 시간을 잠시 편히 쉬다가 다시 비행기를 타면 되겠다 생각하였는데(본래 LA에서 수화물을 찾았다가 다시 비행기에 실어야 하지만 잠시 경유했다가 다시 상 파울로로 향하는 비행기인지라 다행히 다시 찾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 우리는 비교적 편안히 갈 수 있는 케이스였다) 경유하는데도 거쳐야 하는 입국 수속 대기 줄이 너무 길고 또 오래 걸린다. 이대로라면 얼마 쉬지도 못하고 비행기를 다시 타야 할 것 같다. 한참을 기다리다 다가온 우리 순서. 그런데 갑자기 우리 일행 중 한명이 무슨 문제가 생긴 듯하다. 입국 심사를 보던 심사관이 갑자기 다른 직원에게 물어 보고 또 전화를 하며 뭔가 일이 생긴듯한 행동을 하고 있다. 그러다 갑자기 우리 일행을 어딘가로 데려가 버린다. 다행히 LA 공항에서 일하고 계시던 한인분이 계셔서 여쭤보니 무슨 문제가 발생하여 담당 기관으로 갔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도 접촉할 수 없다고... 행여나 지금 발생한 일이 시간이 많이 소모되는 일이라 상 파울로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지 못할 까봐 노심초사 하며 나와 남은 일행은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날따라 2시간 25분이란 시간이 너무나 짧게 느껴졌다.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리던 중 비행기 탑승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중에 다행히도 그 단원이 다시 돌아왔다. 상황을 알고 보니 그 단원은 예전 미국에서 거주한 경험이 있으나 비행기 표를 발권해주던 여행사에서 거주한 적이 없음으로 관련 서류에 기재해 그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다른 큰 문제없이 일이 끝나긴 했지만 시작 초기부터 초조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하니 파라과이에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도착할 수 있어야 할 텐데 라는 조바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LA에서 상 파울로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고서 다시 11시간이 넘는 비행. 다행히도 좌석의 앞뒤 간격이 비교적 넓은 좋은 비행기에다가 LA로 올 때와는 달리 빈 좌석이 꽤나 있었고 난 비행기 중앙에 세 자리를 혼자서 차지할 수 있었다. 영화도 재미있는 것이 많았던 터라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 맥주도 한 잔 하고, 맛있는 밥도 먹고, 잠이 올 땐 아예 세 자리 위에 드러누워 잠을 자고. 그리 힘들지 않게 상 파울로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의 다 도착할 즈음에 창문 너머로 바라본 상 파울로. 도시가 참 예쁘고 내려서 구경해 보고 싶은 욕심도 생긴다. 하지만 아순시온으로 향하는 다음 비행기를 위한 대기 시간이 짧은지라 공항 밖으로는 나갈 수 없었다. 공항에 도착하니 남미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나를 가장 먼저 반긴다. 국제공항임에도 실내 온도가 높아 그렇지 않아도 24시간 동안 씻지도 못한 몸이 나 자신조차도 너무 찝찝하고 불편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파라과이에 도착할 땐 단복을 입고 있어야 하기에 화장실에서 단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더니 더욱 불편하기만 하다. 그러다 기름으로 떡져있는 내 머리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아 다시 샴푸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가 세면대에 머리를 박고서 북북 소리가 날 정도로 정말 힘차게 머리를 감아댔다. 수건은 모두 수화물에 실은지라 화장실에 있던 핸드타월로 머리를 어느 정도 말리고 나니 머리에서 느껴지는 개운함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내 몸이 상쾌하게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파라과이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번에 탄 비행기는 1시간 45분짜리 짧은 거리인데다 우리나라 국적기가 아닌 브라질의 어느 항공사였기에 한 줄에 좌우 각각 3자리씩 배치되어있는, 전에 탄 것보다 좀 더 불편한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그러나 비행시간이 짧기에 이 정도쯤은 정말 아무렇지 않게 버틸 수 있을 꺼라 생각하고 별 부담 없이 의자에 몸을 앉히고 편안히 마지막 비행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피곤에 찌들어 있던 나는 비행기가 이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었고 꽤나 긴 시간을 잠들었다 생각하였지만 비행기는 아직 하늘을 가르며 날고 있었다. 잠에서 깬 뒤 별 생각 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데 기장의 안내방송이 나온다. 대부분 알아듣지 못했지만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서 다시 알려 주겠다’라는 뉘앙스의 말을 들은 듯 했다. 하지만 내가 잘못 알아들었겠지 라고 생각하고 여전히 멍하니 착륙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또 한참을 비행하다 드디어 착륙 준비를 한다. 지면에 가까워질수록 또렷이 보이는 숲과 강과 집들. 이 곳이 내가 2년간 머물러야 하는 곳이란 생각에 조금이라도 더 눈에 더 담고 싶어 장면 하나 놓칠세라 두 눈 부릅뜨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착륙. 현지 시간에 맞지 않는 시간을 손목시계는 가리키고 있었지만 무심결에 시계를 쳐다봤다. ‘음... 4시간 정도가 지났군.... 4시간? 분명 예정 시간은 1시간 45분 이었는데... 기상 문제 때문에 상공에서 맴돌다 내려온 건가?’ 생각보다 늦게 도착하긴 했지만 우리가 도착할 즈음에 공항에 마중 나오기로 한 현지 코이카 사무소 관계자분들께서 예상시간보다 너무 기다리신 건 아닌가, 행여 현지에서 사태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진 않을까 하는 걱정뿐이었지 그 외엔 별 생각 없이 파라과이를 받아드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착륙한지 시간이 꽤나 지났지만 어느 승무원도 내려라 하질 않고 승객들 또한 내리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는게 아닌가. 도대체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건지... 한참을 기다리던 중 기내에 흘러나오던 기장의 안내 방송. 도통 알아먹을 수 없는 언어들이 흘러나오자 갑자기 승객들이 탄식하는 소리를 내며 나갈 준비가 아닌, 이륙을 위해 준비하는 듯한 행동을 취한다. 뭐지? 무슨 일이지?? 근처에 있는 승객에게 상황을 물어 보았지만 그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고 나 또한 스페인어를 하지 못하니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그러다 다른 승객과 짧게나마 얘기하던 우리 일행이 여기가 파라과이가 아니라고 얘기하는 것 같다고 한다. 이건 또 무슨 소리... 짧게나마 알고 있던 스페인어 중 공항의 이름을 묻는 문장이 생각 나 승객에게 물었더니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다시 물었다.
‘공항 이름이 뭐예요?’
‘포르투 알레그레입니다.’
‘여기 파라과이 아닌가요?’
‘아닙니다. 브라질이에요.’
맙소사... 그 뒤 이래저래 다른 승객에게 수소문하다 승객 중에 있던 캐나다인에게 물었더니 기상 상태 악화로 아순시온 공항이
닫혀 있어 한참을 상공에서 맴돌다가 결국 브라질의 포르투 알레그레라는 공항에 내리게 되었고 아순시온의 기상 상태를 지켜보던 중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려 다시 상 파울로로 돌아가게 되었단다. 하... 불행 중 다행으로 우리 팀원 중 핸드폰을 로밍해온 사람이 있었고 그 단원
덕분에 가지고 있던 현지 사무소 관리요원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렸다. 24시간을 넘는 비행 끝에 겨우 도착했다는 감격을 누리려던
순간 이런 소식을 듣고 나니 온 몸에 힘이 빠진다. 어쨌든 현 상황은 파악되었고 다시 한 시간 넘게 비행하여 상 파울로로 돌아갔다. 다시 상
파울로에 돌아온 직후에도 우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항공사 직원이 안내하는 곳으로 이동하여 한참을 기다리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보니 항공사에서
잡아준 호텔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오후 비행기로 이동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수화물을 다시 찾아서 호텔로
가져갔다가 가지고 와야 한다는 것... 한 사람 앞에 최소 개당 23kg이 넘는 두 개의 짐, 그리고 우리 전체 팀원 7명 중 2명만이 남자
그리고 푹푹 찌는 더위(아마 한국에서 겨울을 보내고 온 터라 절대적으로 그리 높지 않은 온도라도 더욱 덥게만 느껴졌던 것 같다) 속에서 짐을
가지고 왔다 갔다 해야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일로 느껴진다. 그래도 항공사에서 무료로 호텔을 잡아 준다는 것이 얼마인가. 그 사실에
감사하며 무거운 짐들과 짐짝 같은 몸을 공항 밖 버스에 싣고 호텔로 이동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호텔에 몰려든 터라 체크인 수속을 밟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호텔이 겉보기엔 허름해 보였지만 안은 상당히 깔끔하고 좋았던 데다가 뷔페식의 석식과 조식이 포함되어 있었고
괜찮은 속도의 무선 인터넷 사용 또한 가능하였다. 오는 길이 험했고 아직 다 오지도 못한 터라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지만 좋은 숙소에 머물며
위로받고 재충전 하여 다음날 다시 공항으로 향하게 되었다.(커피 강국 브라질이 아니랄까봐 조식 때 나오던 대량의 커피 맛 또한 좋았다)
공항에 다시 도착하여 출국 수속을 밟기 위해 출국 심사대에서 심사를 받고 있는데 직원이 뭔가를 자꾸 묻고 뭔가 문제가 있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알고 보니 호텔로 이동할 때에 여권에 출국 도장이라든지 별 다른 수속을 전혀 거치지 않고 공항을 나갔었는데 아마 그 것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다행히도 직원 몇 명이 모여 잠시 의논을 하더니 일행 전원 무사통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후 12시 30분으로 예정되어 있던 비행기가 1시간 지연되어 오후 1시 30분이 되어 있다. 그래 1박 3일 이동 중인데 1시간이 대수냐. 여유롭게 공항에서 더 기다린 뒤 아순시온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탔고 전날 호텔에서 머물고 아침 일찍 깨끗이 씻고 나온 만큼 그 어느 다른 파라과이 기수보다 깔끔한 모습으로 도착한 우리 팀. 그리고 우리를 맞아주시는 현지 코이카 사무소장님과 관리요원님들, 그리고 인턴 분들. 정말 그 순간 마음 속으론 사무소장님 끌어않고 자축이라도 하고 싶었다.
언제 기상문제 때문에 공항 접근이 불가했냐는 듯 파라과이의 하늘은 너무나 쾌청했고 돌을 던지면 '쩌억!‘하는 소리와 함께 깨질 듯이 푸르디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또한 숲 속에 건물이 들어선 듯 한 느낌이 들 정도로 여기저기에 많은 나무들이 자신의 터를 잡고 있었고 낡은 차들과 건물이 꼭 동남아시아 같은 인상을 주고 있었다. 첫 인상 뿐이지만 왜 파라과이를 남미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중 하나라고 말 하는지 아주 조금은 알 것만 같았다. 그 얼마나 험난하게 도착한 곳이던가. 이 곳이 남미이다. 이 곳이 파라과이이다. 2년간 나와 함께 숨 쉬며 공존해야 할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