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스코를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과 함께 침대에서 눈을 떴다. 점심때 즈음에 리마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야 했지만 오전동안 그냥 기다리기만 하다가 공항으로 가기엔 너무 아까워 밥이라도 사먹자는 생각에 숙소에서 제공하는 매우 간단한 아침 식사는 그냥 건너뛰고 밖으로 나갔다.
가보고 싶은 식당이 있어 그리로 바로 향했으나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아님 일요일이어서인지 문이 닫혀 있었다. 다른 곳이라도 가야겠다 싶어 주변을 돌아다녔으나 역시 문을 연 가게가 그리 많지 않았다. 고민하던 끝에 한 가게에 들어갔다. 다른 선택이 없어서 온 것인지 손님은 꽤나 있었다. 자리에 앉고 메뉴판을 보는데 다양한 음식이 조금씩 함께 나오는 메뉴가 있어서 이를 주문했다. 종업원은 주문을 받더니 양이 엄청 많다고, 다 먹을 수 있겠냐며 물어왔다. 고산에 적응하면서 식욕도 거의 되돌아 왔기에 늦은 오후나 저녁이었다면 어떻게든 그냥 꾸역꾸역 먹었을지도 모르지만 이른 아침부터 무리했다가는 비행기도 타야 하는 상황에 하루 종일 고생할 것 같아 잠시 뒤 다시 주문하겠다고 한 뒤 메뉴를 다시 둘러보았다. 아침이라 뭔가 좀 단백하고, 상큼하고, 영양가가 높으며 가벼운 것을 먹어야한다는 의무감 비슷한 그 무엇인가가 나를 압박하였으나 자꾸만 내 시선은 치즈버거라는 글씨를 향했다. 햄버거도 좋아하고 치즈도 좋아하는 나에겐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결국 내 욕구에 따르기로 했다. 치즈버거 하나와 카페라떼를 시켰다. 잠시 기다리니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널찍한 접시에 생각보다 큰 치즈버거가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었고 그 옆에 감자튀김이 곁들여져 있었다. 함께 나온 카페라떼는 따뜻한 걸 차가운 음료를 담을 법 한 길고 각진 유리잔에 담겨져 나왔다. 그 모습이 뭔가 익숙하다 싶어 가만 생각해 보니 호주에서 나오던 방식과 비슷해보였다. 맛을 보았다. 오! 맛있다! 맛도 호주에서 마시던 플랫 화이트와 비슷했다. 고소했고 커피 자체의 향도 좋았으며 우유가 커피 맛을 너무 잡아먹어 버리지도, 그렇다고 커피 맛이 너무 강하지도 않았다. 정말 오랜만에 마셔보는 맛있는 카페라떼였다. 카페라떼에 정신이 팔려 몇 번 홀짝이다 보니 테이블에 놓여 있는 치즈버거를 잊고 있던 게 생각났다. 얼른 포크와 칼을 들고 한 귀퉁이를 잘라내 입에 넣었다. 오! 맛있다! 고기 패티는 육즙을 머금고 있어 퍽퍽하지 않았으며 씹는 맛도 부드러웠다. 그 속에 들어있는 치즈도 맛이 너무 강하거나 느끼하지 않았고 다른 재료들과 함께 잘 어우러지면서도 자신만의 맛을 잘 표출하고 있었다. 너무 맛있었다. 치즈버거도 카페라떼도. 여기를 왜 쿠스코에서 떠날 때가 되어서야 알았을까 싶은 안타까운 마음과 한편으론 지금이라도 이런 맛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은 마음이 엎치락뒤치락 하며 정신없이 먹고 마셨다. 허겁지겁 다 먹고 나니 사진이라도 찍어 놓을걸 하는 생각이 뒤늦게야 떠올랐다. 찍은 거라곤 음식을 기다리다 찍은 꽃 사진 하나가 다였다.
음식을 다 먹은 뒤에도 탁월한 메뉴 선택과 뛰어난 맛에 만족하며 자리에 가만히 앉아 여운을 잠시 즐기다가 기분 좋게 계산하고 든든한 배를 토닥이며 밖으로 나왔다.
식당을 찾아다닌다고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썼기에 바로 숙소에서 짐을 찾고 공항으로 이동해야 했다. 더 머물며 돌아다니고 싶었지만 이젠 떠날 때가 되어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짐을 챙겨 길가로 나가 현지인들에게 물으며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를 잡아탔다. 아르마스 광장 주변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쿠스코를 바라보다 보니 어느새 도착했다. 공항에 들어서 표를 받고 수화물을 붙인 다음 검사대를 지나 게이트가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작은 공항인 만큼 그 내부에 특별한 것은 없어 그냥 게이트 앞 의자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비행기를 기다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쿠스코에 놀러온 듯한 가족 단위의 현지인들이 많았다. 게이트가 열렸고 탑승을 시작하였다. 줄을 서서 기다리다 비행기에 탑승하였고 비행기는 곧 출발했다. 복도 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창밖을 잘 내다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몇 시간 날아간 비행기는 리마에 도착했다. 쿠스코에서 머물렀던 숙소가 마음에 들었기에 같은 브랜드의 숙소가 리마의 미라플로레스에도 있어 예약을 미리 해 놓은 건 아니었지만 일단 그 곳으로 가서 방을 알아보고 없다면 근처 다른 곳을 잡을 생각이었다. 공항 내부에서 손님을 태우는 택시는 매우 비싸단 이야기를 들어 주변에서 택시를 외치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공항 밖으로 나갔다. 그 곳에서 서 있다가 택시 한 대를 잡았다. 이 곳 페루는 미터기가 없어 타기 전 목적지까지의 가격을 흥정하고 타야 하는 곳이었다. 택시 기사에게 물었다.
“미라플로레스까지 얼마?”
“일단 타! 얼른!” 도로 갓길에서 빨리 차를 빼야 한다는 듯 한 자세를 취하면서 상황을 급박하게 만들며 타라고만 재촉했다.
“얼마?” 다시 물었다.
“타! 타! 타!” 택시를 아주 천천히, 조금씩 출발시키며 급하게 타라는 말만 반복했다. 딱히 급하게 출발할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이래놓고 타고 나면 일단 차를 출발시켜놓고 아마 바가지를 씌우겠지. 그냥 내려달라고 해도 이미 출발했다며 얼마 가격을 또 요구해 올수도 있겠지.
“얼마?” 다시 덤덤히 물었다.
결국 아저씨가 희망하는 가격을 이야기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비쌌다. 바가지를 씌우려는 시도가 눈꼴셔 가격 협상을 시도하지 않고 두 말 없이 그냥 보냈다. 조금 더 기다리다가 다른 택시 한 대를 세웠다. 미라플로레스까지 가격을 물으니 전 택시와 비슷한 가격을 불렀다. 비싸다고 이야기 하니 얼마를 원하냐고 물어왔다. 희망 가격을 이야기하니 기사 아저씨는 잠시 고심하던 끝에 승낙. 택시에 몸을 실었다.
공항은 들었던 대로 센트로에서 꽤나 떨어져 있었다. 택시를 타며 이동 중에 본 리마는 충격이었다. 생각보다 도시가 정말 크고 높은 현대식 건물이 여기저기에서 솟아있었다. 쇼핑몰인지 대형 마트인지 모를 큰 상가들도 많았고 사람들도 엄청 많았다. 파라과이의 수도인 아순시온은 이 곳이 수도인가 싶은 정도로 정말 작고 뭐가 없다. 괜히 코이카가 파견된 곳이 아니구나 하는 느낌이 절로 들게 되는 곳이다. 그런 곳에 익숙해져 있다가 아무런 기대도 없이 리마에 도착했기에 놀라운 규모에 시골 촌놈마냥 멍하니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도시 구경에 놀란 촌놈 표정 너무 티가 나진 않도록 적당히 자제하며 주변을 보다 보니 큰 도로와 골목을 번갈아가며 한참을 달리던 택시는 마침내 미라플로레스에 도착하였다. 미라플로레스는 더더욱 크고 번화한 곳이었다. 리마에선 별로 볼게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던지라 이 곳에서는 그냥 하루만 묵고 내일 파라과이로 다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로 되어 있는데 막상 리마에 도착하고 보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쿠스코도 워낙 좋았기에 기회가 있었다면 일정을 바꾸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리마에서 특정한 무엇을 보러 다니는게 아니더라도 그냥 배회하며 다니더라도 좋을 듯 했다.
묵기로 생각했던 숙소로 찾아가니 다행히 빈 방이 있어 체크인을 하고서 리마에서의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덜 남기기 위해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숙소 근처에 있던 기념품 판매점 밀집 구역에 가서 이리저리 한참을 구경한 뒤 배가 고파져 유명한 세비체 집으로 가서 밥을 먹기 위해 이동하였다. 열심히 걸어서 식당에 도착하였으나 이게 웬걸. 이 날 딱 하루만 공사로 인해 휴업.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어찌할까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길을 건너 바로 또 다른 식당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가까이 가보니 문 앞에 놓여 있던 메뉴에 세비체가 있었다. 식당은 고급스러워 보였고 그만큼 비싼 가격이었으나 어차피 원래 가려고 했던 식당에서 큰돈을 쓸 각오를 했었고 유명한 집 건너편에서 망하지 않고 버젓이 장사를 하고 있는 곳이니 이 곳도 괜찮은 거겠지 라고 믿으며 들어갔다. 점심도 저녁도 아닌 애매한 시간이었기에 손님은 별로 없었다. 들어가서 바로 가게 앞 메뉴에서 보았던 세비체를 주문했고 그리 기다리지 않은 뒤 바로 세비체가 나왔다. 가격이 비싼 만큼 일단 플레이팅의 급이 쿠스코 재래시장에서 먹은 것과는 급이 달랐다. 재료들도 훨씬 신선하고 질이 좋아보였다. 조심히 먹어보았다. 역시 맛도 훨씬 좋았다. 비싼 돈 주고 맛이 없으면 어떡하나 하고 내심 조심스러웠으나 가치가 있었다. 문을 닫은 옆의 유명한 식당은 더 맛있었을라나. 배가 워낙 고팠던지라 폭풍 흡입을 하고 계산을 한 뒤 거리로 나왔다. 이번에는 서둘러 센트로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걸어가기엔 너무 멀고 택시를 타기엔 조금 그래서 메트로폴리타노(El Metropolitano)라는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길거리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고 행선지가 나와 있는 표지판을 보니 센트로로 향하는 버스였다. 어떻게 타는지 눈치를 보니 줄을 서면 근처에 있던 직원이 돈을 받고 목적지에 따라 표를 끊어주는 듯 했다. 줄을 서니 직원이 다가왔고 목적지를 이야기하면서 돈을 내밀고 거스름돈과 표를 받았다. 무슨 일인지 버스 두 대 정도가 그냥 지나간 뒤 탑승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퇴근시간이었던 것. 얼마 가지 않은 뒤부터 엄청난 사람들이 꾸역꾸역 타기 시작했고 길은 엄청나게 밀렸다. 일반적인 운행 속도라면 20분이면 갈 것 같은 거리였는데 한 시간 정도나 걸려서 겨우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미라플로레스에서 벗어나니 확실히 삐까뻔쩍한 현대식 건물이 줄어들었고 주위 분위기도 조금 달라졌다. 미라플로레스쪽이 가로수길 같다면 센트로쪽은 명동 같다고나 할까. 대로에서 길을 따라 몇 블록 걸어 들어가니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산 마르틴 광장이 나왔다.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매우 매력 있었다. 생각 같아선 오랫동안 벤치에 앉아 쉬면서 구경을 하고 싶었으나 시간이 얼마 없었기에 광장 주변을 걸어다니며 잠시 구경한 뒤 바로 도보전용 길을 따라 산 마르틴 길을 향해 나섰다. 아르마스 광장에서부터 산 마르틴 광장으로 향하는 길은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곳곳엔 트리와 꽃, 그리고 전구 등으로 된 장식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가족, 연인, 친구들과 함께 길을 다니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산 마르틴 광장에 도착하여 주변을 잠시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고 산 마르틴 동상 앞에 앉아 잠시 쉬다가 다시 메트로폴리타노를 타기 위해 큰 길로 나섰다. 그 와중에 좀 전에 먹었던 세비체의 양이 그리 많지 않았던 탓에 또 배가 고파왔다. 뭘 좀 먹어야겠단 생각이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니던 중 길 옆에 있는 식당 하나를 발견했다. 관광객들보다는 현지인 손님이 대부분인 곳인 듯 했고 저녁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한창 청소를 하며 오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밖에서 보니 이 곳에도 세비체를 팔고 있었다. 바로 전에도 세비체를 먹었지만 또 먹고 싶었다. 파라과이로 돌아가면 해산물을 즐기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더더욱 또 먹고 싶었다. 가게로 들어서 세비체의 가격을 물어보니 싸진 않았으나 늦은 점심으로 먹은 고급스러운 곳 보다는 저렴했다. 세비체를 주문하면서 자리를 잡았다. 이제 막 오픈한 탓인지 조금 기다려서야 음식이 나왔다. 플레이팅은 확실히 고급스러운 맛은 없었으나 재료의 질은 나빠 보이지 않았고 양은 훨씬 많았다. 한 입 먹어보니 맛 또한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음식과 함께 나온 매콤한 소스를 곁들여 먹으니 또 색다른 맛이었다. 세비체를 국수 먹듯이 후루룩 먹고서 계산을 하고 다시 버스를 타러 나섰다.
가는 중에 길거리에서 악세사리를 펼쳐놓고 파는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이 있었다. 팔찌를 좀 사고 싶었는데 오늘 들렀던 기념품 판매점 밀집구역에선 맘에 드는 걸 찾지 못해 그냥 나왔었는데 이 곳에 언뜻 보니 괜찮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격을 물어보니 하나에 3솔을 불렀다. 좀 많이 살 생각이었기에 이를 무기 삼아 가격을 좀 깎아보기로 했다.
“나 많이 살껀데 깎아줄 거야?”
“응. 얼마나 살껀데?”
“음... 20개에 30솔. 어때?”
개당 1.5솔, 처음 부른 것 보다 반을 깎은 가격을 불렀다. 이 정도가 적정선이라 생각해서 이렇게 불렀는데 제안을 듣고 난 후 파는 이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가격 협상에 실패한 것인가 싶은 생각에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던 중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면... 하나에 1.5솔 인건가?”
가격이 맘에 들지 않았던게 아니라 하나 당 얼마인지 계산이 되질 않았던 것이었다.
“응. 하나에 1.5솔”
“좋아”
다행히 협상을 순조롭게 끝내고 팔찌 20개를 고르기 시작했다. 그 사이 이야기를 조금 나눴는데 여자는 볼리비아 사람이었고 남자는 페루 사람인데 액세서리를 팔면서 여기저기를 다니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파라과이에도 있었단다. 20개를 다 나누고 마저 끝내지 못한 이야기를 잠시 나누다가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든든해진 배와 마음에 드는 팔찌를 손에 잔뜩 쥔 채 버스를 타고 다시 숙소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